체르노빌 원전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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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중대사고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스리마일아일랜드 원자력발전소 사고,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구 소련의 체르노빌(Chernobyl)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중대사고를 중심으로 사고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사고의 영향과 교훈을 기술한다[1].

원자력발전소 개요와 사고 전 운전조건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구 소련(현재의 우크라이나)의 키에프(Kiev)시 북쪽 100km 지점에 위치하고, 발전소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주로 체르노빌 발전소 근무자를 위한 신흥계획도시 프리피야트(인구 49,000여명)가 있으며, 발전소에서 반경 30km 이내의 총인구는 약 12만 명이었다. 발전소에는 전기출력 1,000MW급(열출력 3,000MW)의 RBMK-1000 원자로 4개 호기가 가동중이었고 VVER원자로 2개 호기가 건설중이었으며, 1984년 4월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한 체르노빌-4호기에서 1986년 4월 26일 사고가 발생하였다.

RBMK(러시아어로 ‘고출력 압력관형 원자로’)-1000 원자로는 소련 고유설계의 흑연감속 압력관형 비등형경수로로서, 원자로에는 감속재인 흑연 블록들로 채워진 사이를 1,661개의 수직 압력관(직경 약 9cm)이 관통하고 제어봉들이 위치하고 있다. 압력관(핵연료채널) 내에는 핵연료(U-235 농축도 2%)와 냉각재(경수)가 위치한다. 원자로냉각재 순환유로는 2개로 각 유로가 노심의 절반을 담당하며, 각 유로마다 4기의 원자로냉각재펌프(3기는 사용, 1기는 대기)와 2기의 증기드럼(Steam Drum)을 갖고 있다. 아래 그림은 RBMK-1000 원자로의 계통구성을 개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RBMK-1000 원자로 개념도[1]


1986년 4월 23일(토) 발전소는 정기점검을 위한 원자로 계획정지에 앞서 소외전원 상실 후 디젤발전기에 의한 비상전원 공급개시까지의 시간동안 터빈의 관성회전이 비상장비와 노심냉각수 순환펌프를 기동시키는데 충분한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시험할 계획이었다. 이 시험은 안전과는 무관하다고 간주되어 시험팀이 원자로안전 요원과 충분한 정보교환이 없었다. 원래 시험계획은 원자로 열출력을 정격 열출력의 22~32%(700~1,000MWth)로 낮추고, 두 개의 터빈-발전기 중 하나를 정지시키고, 각 원자로냉각재 유로에 있는 4개의 펌프 중에서 2개는 외부 전력원에서 그리고 나머지 2개는 터빈발전기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도록 전력공급선을 전환한 상태에서 터빈으로의 증기 공급을 차단하고,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하여 전기가 생산되는 시간을 측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시험에서 운전원의 실수로 원자로의 열출력은 30MWth 정도까지 낮추어졌으며, 운전원이 수동으로 제어봉을 조정하여 열출력을 700~1,000MWth까지 올리려는 과정에서 출력감발에 따라 노심에 축적된 제논의 중성자 흡수효과를 상쇄하기 위하여 많은 제어봉을 인출해야 했다. 표준절차에 따르면 최소 30개의 제어봉이 항상 원자로 노심 내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어봉을 과잉 인출하여 6~8개만 남게 되었고, 이 상태에서 원자로가 열출력 200MWth 근방에서 안정된 시각이 4월 26일 1시경이었다.

사고의 발생과 진행

운전원은 시험 후의 충분한 노심냉각을 위하여 8개의 원자로냉각재펌프를 모두 작동함으로써 냉각재의 유량이 증가하여 증기압이 감소했는데, 운전원은 ‘저’증기압 신호에 의한 원자로정지를 방지하기 위해 원자로 자동정지계통을 무력화(Block)시켜 버렸다. 이 상태에서 원자로정지와 터빈에의 증기공급을 차단하면서 시험이 시작되었으며, 외부전원 대신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한 전력이 원자로의 계통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저출력으로 운전되던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한 전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원자로냉각재펌프의 회전이 줄게 되었고, 이에 따라 원자로냉각재 유량이 감소하면서 냉각재 온도가 상승하였다. 냉각재의 온도상승에 따른 증기생성에 의해 정(+)기포계수의 작용으로 원자로출력이 상승하기 시작했으나 제어봉 구동속도가 늦어 운전원은 이를 제어할 수 없었으며, 결국 정격 열출력의 약 100배(30만MWth) 정도까지 출력폭주가 일어났다. 이때의 시각은 4월 26일(토) 1시 23분이었다.

출력폭주로 핵연료가 파손되자 고온의 핵연료 파편조각들이 물과 반응하여 급격한 증기 생성으로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원자로 노심을 파괴하는 폭발이 발생하였으며, 2~3초 후에 두 번째 폭발이 뒤따랐다. 폭발을 일으킨 원인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첫 번째 폭발은 증기폭발로 간주되며, 두 번째 폭발은 수소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 차례의 폭발은 원자로 노심을 포함하여 원자로건물의 지붕까지 파괴함으로써 다량의 고온・고방사능 핵연료와 흑연 파편을 공중으로 비산시켰다. 이들 파편이 공중 1km까지 치솟았고 무거운 것은 부지근처에 낙하하였으나 불활성기체를 포함하는 가벼운 성분들은 바람을 타고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이어서 원자로 잔해, 터빈건물 지붕 등에 발생한 화재는 방사성물질의 방출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고공으로 끌어올려 피해를 원거리까지 확대시켰다. 특히 4월 26일 5시경부터 시작된 원자로 노심 부위의 흑연화재는 이를 진압하려는 시도가 증기폭발이나 핵임계를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속히 진행되지 못하고 10여일이나 지속되어 방사성물질의 방출을 더욱 가중시켰다.

비상대응과 사고수습

사고발생 2시간 후 발전소에서 3km 떨어진 프리피야트에 비상본부가 설치되었고, 사고지역에 차량출입의 통제가 개시되었으며, 4월 26일 정오부터 인근 지역에 대한 방사능 측정이 실시되었다. 4월 27일부터 노출된 원자로 상부에는 헬기를 이용하여 수백 톤의 붕소(핵임계 방지), 납(방사선차폐), 진흙과 모래(방사능 차단 및 필터), 백운석(열흡수와 탄산가스 생성으로 소화 보조) 등이 투하되었다. 노심 용융물이 하부 지층까지 침투할 우려에 대비하여 5월 9일부터 15일간 400여명이 동원되어 원자로 하부를 굴착하고 냉각계통을 가진 콘크리트판을 설치하였다.

사고발생 36시간이 지난 4월 27일 14시부터 발전소에서 3km 떨어진 프리피야트 주민에 대한 1차 소개(Evacuation)가 시작되었으며, 40,000여명의 시민이 3시간 정도에 걸쳐 소개를 완료했다. 4월 30일부터 원자로에서 반경 10km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2차 소개가 있었으며, 5월 2일에는 소개지역을 반경 30km까지 확대하여 소개를 계속하여 총 167,000여명이 소개되었다. 주민이 소개된 지역은 ‘금지구역’으로 지정되고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사고의 교훈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경험을 통하여 원자로 노심의 반응도 제어를 위한 설비 개선 등 많은 보완조치가 이루어졌으나, 무엇보다도 발전소의 운영조직을 포함한 운전원의 안전에 대한 의식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교훈은 원자력 안전문화(Safety Culture)로 구체화되어 발전소의 안전운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계기로 원자력사고는 그 피해범위가 당사국은 물론 국경을 초월하는 광역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원자력안전에 대하여 전 세계가 공동적으로 대응할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원자력사고 피해의 광범위성과 심각성을 실감한 국제사회는 이러한 원자력사고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1986년 10월 핵사고의 조기통보에 관한 협약과 1987년 2월 핵사고 또는 방사능 긴급사태시 지원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약의 발효로 원자력사고 시 사고발생 국가는 이에 대한 정보를 인접국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를 포함한 전 세계에 신속히 알려 적절히 대처하게 하고, 피해당사국에 대한 전문가 파견을 포함하는 기술적 지원을 위한 국제적인 안전협력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국제원자력기구를 중심으로 국제사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원자력시설의 안전관리 책임과 권한이 원자력시설을 보유한 국가에 있지만 세계적인 원자력 안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원자력시설 보유국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국가별로 추진해 온 원자력 안전성 확보개념에서 세계중심의 안전성 확보개념으로 전환해 나가고자, 국제원자력기구 주관으로 원자력안전에 대한 국제공동노력의 제도적 장치로서 1996년 10월 24일 원자력안전협약이 발효되었다.


참고문헌

  1. 1.0 1.1 김효정, “원자력 안전해석”, 정기획출판사. pp.842, 2016. 6.


이 자료의 최초 작성 : 김 효정(GINIS) kimhhoj@gmail.com, 등록 : 박 찬오(SNEPC) copark5379@snu.ac.kr